퍼퓸 디렉터 톰의 못다 한 이야기

2023-03-30

JTBC '히든싱어 5'에 출연했던 톰(오른쪽)은 가수 자이언티(왼쪽)와의 닮은 외모로 얼굴만큼은 1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Behind the scenes #1

 

들어본 적이 있을까? ‘조향사 자이언티’라고. 5년 전 ‘히든싱어’에서 자이언티를 닮은 외모만큼이나 뛰어난 모창 실력을 보여주었던 출연자였다. 그는 3라운드에서 탈락했음에도 높은 싱크로율(?)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그가 바로 퍼퓸 디렉터 톰이다.

 

2018년 히든싱어에 출연한 때만 하더라도 톰이 내세울 수 있었던 건 ‘국내 최초 향수 전문 채널 운영자’라는 타이틀뿐이었다. 2016년 향수 브랜드 론칭을 목표로 회사를 설립했지만 플리마켓에서 선보인 시제품을 제외한다면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으니까. 특히 해외 조향 전문학교의 졸업장이나 유명 브랜드에서 쌓은 경력이 없던 그에겐 하루하루가 도전이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인맥도 없었다. 유튜브 구독자들만이 그를 응원해 줄 뿐이었다.

 

같은 해 겨울, 향수를 시각적으로만 다루는 것에 한계를 느낀 톰은 브랜드 쇼룸 마련에 나섰다. 그동안 선보였던 시제품들도 소개하고 앞으로 만들 향수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 나갈 계획이었던 것. 그러던 중 톰은 사후 면세점 입점 제안을 받게 되었다. 생각만큼 일이 잘 풀리지 않던 그에게 작은 성과라도 필요했던 탓일까. 달콤한 제안을 승낙하고 마는데, 그 제안은 미숙한 젊은 창업가를 대상으로 한 사기였다. 보증금 천만 원을 한순간에 잃게 된 톰은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처음으로 포기할까 생각했다고.

 

그런 그를 붙잡아 준 건 회사를 함께 설립한 윤수연 대표였다. 그녀는 톰과 중학교 동창이자 같은 꿈을 향해 걸어온 동료다.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후회 없이 끝내자며 크라우딩 펀딩에 한 번 더 도전해 보자고 톰을 설득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크라우딩 펀딩, 와디즈에 섬유 향수를 선보이기로 했다. 플리마켓에 선보였던 시제품을 6개월가량 보완하고 가다듬은 제품으로 보헤미안 감성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었다.

와디즈에 선보였던 톰빌리 섬유 향수



다소 어려운 콘셉트 때문이었을까. 오픈 예정으로 공개된 톰의 섬유 향수에 공감하는 이들은 극소수였다. 끝날 땐 끝나더라도 이렇게 마무리할 수 없다는 생각에 톰은 실제 오픈까지 남은 1주일 동안 제품의 콘셉트와 구성을 바꿔보기로 했다. ‘24시간 향 지속’, ‘잔향 깡패’ 등 지속력과 발향을 극대화한 제품으로 말이다. 사람들이 더 반응할 만한 것에 집중하기로 한 결과물이었다. 결과는 대성공.

 

많아야 300명 정도로 끝나는 오픈 예정의 제품에 3000여 명이 몰렸고, 오픈 이후엔 3일 만에 4000만 원 가까이 펀딩 금액을 모았다. 라이프 스타일 제품 중 향 부문에서 1등을 기록함은 물론 N차 펀딩이 낯설던 시절 4~5번 더 진행됐다. 펀딩 누적 금액은 1억 원 가까이 모였다. 당시 와디즈 내부에선 가장 센세이션한 케이스로 불리며 톰의 향수를 담당했던 PD는 승진까지 했다고. 이를 계기로 톰은 스타트업 전문 투자사 나눔 엔젤스로부터 투자금도 유치하게 됐다.

 

기쁨도 잠시.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톰에게 또 다른 어려움이 찾아왔다. 본격적인 향수 생산을 목표했던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국경이 닫히면서 원자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생산은 미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힘들게 한발 내디뎠던 톰은 여기서 멈추기 싫었다. 론칭할 브랜드의 정체성과 방향에 대해 다시 고민하는 동시에 유튜브를 통한 소통에 힘을 쏟았다. 인식의 범위를 넓히는 과정에서 알게 된 색다른 향을 담은 브랜드를 소개하기도 했는데, 그중 하나는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니치 퍼퓸 브랜드 프란체스카 비앙키(Francesca Bianchi).

 

우아하면서도 관능적인 면모가 부각되어 마치 입생 로랑(Yves Saint Laurant)의 ‘매운맛’ 버전처럼 다가왔다고. 화려하면서 섹시함이 돋보이는 브랜드 킬리안(Kilian)과 톰포드(Tom Ford)보다 더 센 ‘29’금 향수. 격렬한 향과 에로틱한 면모는 낯설었지만 매력적이었다.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독특한 콘셉트의 향수를 들여와 국내 향수 신(Scene)에 다양성을 더하고 싶었던 톰



니치 퍼퓸 브랜드의 범람 속에서 프란체스카 비앙키는 색다름에 목마른 국내 소비자들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고 생각한 톰. 게다가 자유를 잃어버린 일상에서 강한 자극은 그 어느 때보다 승산이 있어 보였기에 국내 론칭 제안을 해보기로 했다. 이메일 주소 하나 없는 홈페이지에 무작정 글을 남겼다. ‘조향사가 향수 뿌리는 법’와 같이 조회수 이백만 뷰를 넘긴 본인 영상들도 첨부했다. 반응이 올 때까지 걸린 시간은 10일.

 

프란체스카 비앙키 대표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다 보니 답이 늦었다며 사과부터 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두 명이 운영하던 브랜드였으니. 참고로 현재 프란체스카 비앙키는 연 매출 100억이 넘는 핫한 브랜드로 성장했다. 프란체스카 비앙키 대표는 자신의 제품은 대중적이지 않은 향인데, 은은한 향을 선호하는 아시아에서 힘들지 않겠냐며 우려를 표했다. 톰은 한국에서 르라보(Le Labo)처럼 강한 캐릭터를 가진 향이 오히려 주목받고 있다며 설득을 이어나갔다.

 

색다른 향으로 향수 시장의 저변을 넓히겠다는 한 남자에게서 자신의 지난날을 봤던 걸까. 온라인 제품 소개와 리뷰만으로 광고 및 판매를 진행하겠다는 당당함도 신선했을 터. 신생 브랜드였기에 잃을 것이 크지 않겠다 생각한 그녀는 결국 톰과 함께 새로운 도전에 나서기로 했다. 2021년 여름, 톰은 공식 디스트리뷰터의 자격으로 국내 최초로 프란체스카 비앙키 향수 12개를 론칭했다.

 

3개월 동안 온라인에서만 진행된 마케팅과 판매로 이룬 매출은 약 2억 원. 시향조차 하지 않고 보이는 이미지로만 판매를 유도했다는 점에서 프란체스카 비앙키는 만족할 만한 성과로 평가했다고. 참고로 프란체스카 비앙키와의 또 다른 협업은 현재 논의 중이라고 한다.

톰이 톰빌리와 함께 운영 중인 퍼퓸 브랜드 구트구일



이듬해 톰은 마침내 자신의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았다. 진정한 덕후는 자신의 호사를 위해 시간과 재물의 손해를 마다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섬유 항수를 선보인 지 3년이 지난 지금 그는 니치 퍼퓸 브랜드 ‘톰빌리’와 ‘구트구일’을 통해 창조자로 한 발 더 나아갔다. 현실은 생각보다 향기롭진 않았지만 좋다는 이유로 견뎌낸 지난 7년. 톰은 앞으로도 자신의 향을 세상에 불어넣어 더 많은 이들과 나누겠다고 한다. 덕질의 끝은 셀프 창작이 맞나 보다.

1947년 12월 공개된 디올의 첫 번째 향수 'Miss Dior'과 출시 행사 초대장



Behind the scenes #2

 

샤넬(Chanel), 디올(Dior), 발망(Balmain), 지방시(Givency).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 브랜드의 공통점은 뭘까? 프랑스 그리고 향수. 패션 하우스 설립자 모두 프랑스 출신이며 향수를 패션의 영역으로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20세기, 향수에 각 브랜드의 고유한 이미지가 입혀지면서 향수 대중화에 속도가 붙었다. 패션쇼를 통해 특정 이미지를 보여주는 브랜드의 덕분에 후각에만 의존했던 향수의 제약은 점차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는 현대적 향수의 발상지로 불린다. 조향사를 꿈꾸는 이들이 가장 이상적인 배움터로 프랑스를 꼽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퍼퓸 디렉터 톰을 포함해서.

 

프랑스에서 조향사가 되는 방법 중 하나는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한 뒤, 다른 조향 전문학교에서 공부를 더 하는 것이다. 그중 유명한 곳은 이집카(ISIPCA)다. 1970년 프랑스 출신 조향사 장 자크 겔랑*가 설립한 학교다. 향수에 대한 공부를 시작해야겠다 결심한 후, 톰은 프랑스의 조향전문 학교 이집카로 유학을 준비했다. 여러 프랑스 조향 전문학교들 중에서 긴 역사와 명성을 자랑하고 곳이니까.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조향사들 중에는 이집카 출신들이 많다. 최근 프랑스 니치 향수 브랜드 딥티크(Diptyque)의  신제품, 로 파피에(L'Eau Papier)를 만든 조향사 파브리스 펠레그린(Fabrice Pellegrin)도 이집카 출신이다. 

2017년 이탈리아에 두 번째 부티크를 오픈했던 프레데릭 말



유학을 준비하던 중 톰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아는 것이 많지 않던 분야라 남에게 의존해서 쉬운 길을 선택하려고 했던 건 아닌가 하고. 향수는 특정 교육 기관에서 공부한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니었다. 경제학을 전공했던 프레데릭 말*도 조향사로 명성을 날리며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로 성공했으니까.

 

더욱이 이집카를 졸업한 한국인 중 유명 브랜드에서 활동하거나 개인 브랜드를 론칭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자신의 생각을 향으로 표현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익히는 것이 먼저였던 톰은 학교 대신 현장에서 자신의 꿈을 펼쳐보기로 생각을 바꾸게 된다. 이때가 2013년 즈음이었다. 톰이 회사를 설립하기 3년 전이었다.

번역된 책이 많지 않아 원서를 보며 향수를 공부했던 톰 



조향 학원을 다니고 책을 읽으면서 지식을 쌓는가 하면 IFF(International Flavors & Fragrances)나 피르메니히(Firmenich) 등 해외 향료 회사에도 연락해 향료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감각의 범위를 넓히는 일종의 후각 훈련을 위한 것이었다. 해외 향료 회사들은 이러한 문의에 한국 지사 담당자의 연락처로 대답했고, 톰은 사무실이건 공장이건 직접 찾아갔다. 생산 과정을 직접 보고 물어보는 과정에서 향수 병이나 캡 등 부자재를 생산하는 업체도 소개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를 계기로 귀중한 인연이 시작됐다.

 

발품 팔며 돌아다니며 알게 된 한 공장의 대표로부터 어느 한 향수 교육 세션을 추천받은 톰. 호기심 반 의심 반의 마음으로 찾은 세션. 그곳에서 이새미 조향사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몇 안 되는 이집카 한국인 졸업생이다. 1년간 이어진 세션을 통해 톰은 향수 산업에 대한 시각을 넓힐 수 있었다. 특히 향수 상품화 과정에 대한 배움이 컸다고, 덕분에 톰은 마케팅과 브랜딩부터 제품 출시를 위한 서류 작업까지 브랜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익히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톰은 향을 분해하고 조합을 찾아가는 후각 훈련을 매일 한다.



톰은 지금도 매일 아침마다 향수 하나를 골라 그 향을 샅샅이 분해한다. 어떤 향료들이 어떻게 조합했길래 이런 냄새가 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학교를 벗어나 무언가를 배운다면 스스로 생각하고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톰. 그는 하나를 배우더라도 무수히 많은 실패를 반복하게 됐지만 그 과정은 졸업장보다 더 값진 자산이었다고 말한다.




에디터  이순민| 사진 출처 JTBC Entertainment·프란체스카 비앙키·크리스챤 디올·프레데릭 말



* 장 자크 겔랑은 샬리마(Shalimar), 미츠코(Misouko), 로르 블루(L’Heure Bleue) 등 기념비적인 향수를 선보인 브랜드 겔랑(Guerlain)을 설립한 겔랑 가문의 일원이다. 겔랑은 1994년 LVMH 산하 브랜드가 됐다.


*프레데릭 말은 니치 퍼퓸 브랜드 프레데릭 말(Frederic Malle)의 설립자다. 조향사가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며 조향사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 이름을 제품에 표기한 인물로 유명하다. 브랜드의 대표적인 제품으로는 카날 플라워(Canal Flower)와 뮤스크 라바줴(Musc Ravageur)가 있다. 참고로 그의 외할아버지인 세르주 애틀러-루이쉐는 디올 퍼퓸의 창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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