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실험적인 맥주'를 만들겠다며 수제맥주 브랜드를 창업한 어느 양조사가 있다. 그저 특별할 것 없는 브루어리의 창업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양조장' 없이 시작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 양조사가 선택한 해결책은 '집시 브루잉'. 명칭 그대로 집시(Gypsy)처럼 전국의 여러 양조 시설을 떠돌며 함께 맥주를 생산하는 방식이다. 수년 간 연구해 온 수제맥주 레시피를 가지고, 다양한 브루어리와의 컬레버레이션을 꾀한 것!
전략은 통했다. 야생 효모와 제철 식재료를 활용한 K-수제맥주로 화려하게 데뷔한 후, 창업 1년 만에 아시아 최대 규모의 세계 맥주 대회 '인터네셔널 비어 컵 2018'에서 동메달을 거머줬다. 발길이 끊긴 종로구 서순라길에 선보인 펍은 이제 오픈런해야 하는 맛집으로 거듭났다. 매장에서 새로운 맥주를 공개하는 일명 '릴리즈 데이'에는 개장 1시간 전부터 대기줄이 이어질 정도다.
이는 2017년 이현오 대표가 창업한 '서울집시'의 이야기다. 그는 소수의 니치 마켓을 겨냥해 고집스럽게 맥주와 펍을 기획한 것이 브랜드 팬덤을 쌓은 비결이라고 말한다. 굳건하게 밀어붙인 자세가 브랜딩으로 이어졌다는 7년간의 여정을 들어봤다.
서울집시 펍이 위치한 서순라길 및 서울집시 맥주
딱 1번의 기회를 원했던 양조사
맛있지만 아직 대중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맥주. 이 대표가 브루어리에서 양조사로 재직하던 2015년, 신제품용 샘플을 낼 때마다 돌아온 피드백이다. 그는 당시 한국 수제맥주 시장에 아쉬움을 느꼈다. 2014년부터 소규모 양조장의 외부 유통이 허용됨에 따라 본격적으로 국내 수제맥주 시장이 태동했지만 주로 전통적인 에일 맥주들이 유통됐다. 소비자들의 선호도에 따른 자연스러운 시장 흐름이었다.
한편 이 대표는 국내 수제맥주 시장이 발전하려면 실험적인 에일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개성 넘치는 한 잔'을 목표로 신제품 개발에 몰두했으나 사내에서 매번 퇴짜 맞기 일쑤였다. 회사 입장에선 당장 안전한 길을 내버려두고, 성공 가능성이 불확실한 제품에 투자할 리 없었다.
1) 서울집시 펍 앞에서 대기 중인 손님들, 2) 서울집시 펍 내부
결국 실험적인 한국 맥주를 만들겠다는 각오로 퇴사했다. 하지만 열정과 달리 창업이란 현실은 냉정할 뿐이었다. 당장 양조장을 차리는 것부터 버거웠다. 장비를 추가하다 보면 1~2억 원은 우습게 들어가는데, 모아놓은 월급과 퇴직금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투자자를 찾는 것도 모순적이었다. 애초에 당장 수익이 나지 않을 독특한 맥주를 만들려고 퇴사한 건데, 투자를 받게 되면 많이 팔릴만한 대중적인 제품을 만들자는 개입이 들어올 게 뻔해서다. 창업 후 지금까지 모든 투자 제안을 거절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 대표는 현실적으로 집시 양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2년 넘게 연구해 온 수많은 양조 레시피를 가지고, 브루어리 섭외에 나섰지만 순탄치 않았다. 해외 시장과 달리 국내에선 '집시 양조'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한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대략적인 콘셉트와 맛을 의뢰하면 그에 맞춰 만들어 주는 OEM 방식이야 흔했지만, 레시피 보완부터 실제 생산까지 모든 단계를 함께 구체화하자는 제안에는 브루어리들이 부담스러워했다.
게다가 자연 효모를 채취하고 깔끔한 맛을 내기 위해 더 오래 숙성하는 레시피인 탓에 평균 대비 양조 기간이 2배 이상 소요된다는 점도 문제였다. 생산비 부담이 가중된다는 점에서 소규모 양조장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일부 업체에선 "OEM하면 2주 만에 출시하는데, 팔릴지도 모르는 제품에 한 달 가까이 투자할 수 있겠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매일 불안감에 휩싸였지만 포기하진 않았다. 단 한 번의 협업만 성사시키면 그 맥주를 성공시켜서 향후 다른 브루어리들을 설득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로 활용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약 4개월 동안 자신처럼 실험적인 수제맥주를 원하는 양조장을 찾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 통씩 전화하고, 전국을 순회했다. 숱한 노력 끝에 맥주에 대한 진심을 높이 평가해 준 양조장과 함께 첫 번째 파트너십을 맺었다.
서울집시 펍 내부의 탭 코너
1%에 집착할 줄 아는 자세
이 대표는 처음부터 '맥주 덕후들이 좋아할 만한 이색적인 맛'을 목표 삼았다. 당장은 대중에게 외면받더라도 맥주 마니아들로 구성된 니치 마켓에선 인정받자는 전략이었다. 절대적인 규모는 작지만 시장에서 새로운 맛을 알리고 트렌드를 선도하는 집단인 만큼, 브랜드가 다수의 잠재 고객에게 알려지는 교두보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들을 겨냥해서 정한 콘셉트는 팜하우스 에일! 팜하우스란 동유럽 농부들이 농사를 짓고 남은 작물로 만들던 맥주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전 세계 맥주 종류마다 쓴맛과 탄산감 등의 대략적인 정도가 규정된 것과 달리, 팜하우스는 사용하는 재료와 양조 방식이 제각각이라 기본 맛을 중심으로 여러 변주를 주는 것이 특징이다. 와인처럼 한국식 떼루아*를 살린 새로운 K-맥주를 갈망하던 그에겐 훌륭한 선택지였다.
*떼루아: 와인, 커피 등이 만들어지는 자연 환경
1) 서울집시가 복분자로 만든 복분자 IPA, 2) 다양한 식재료를 활용하는 서울집시의 개발 과정
맥주의 필수 재료 4가지(물, 맥아, 효모, 홉) 중 가장 먼저 '효모'에 차별점을 뒀다. 대중적인 맥주를 제조할 땐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효모를 투입하는 것이 효율적이지만, 수제맥주의 개성을 살리려면 공기 중에서 확보한 자연 효모를 더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재배조건이 까다로워서 주로 수입하는 홉과 달리, 효모는 번거롭지만 국내에서도 채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욕심낼만한 재료였다.
팜하우스 맥주답게 로컬 식재료도 적극 활용했다. 안동 햇생강, 지리산 생제피(잎), 이천 쌀, 제주도 하귤 등 수제맥주 시장에서 보기 드문 재료들을 가미하고 각 재료의 매력을 살린 것이 특징이다. 예컨대 이천 쌀로 부드러운 질감과 단 맛을 높이고, 안동 햇생강으로 스파이시함을 강조하고, 지리상 생제피 잎과 제주도 하귤로 시트러스함을 더한 맥주들을 선보였다.
제철 식재료로 만든 제품도 꾸준히 출시해왔다. 봄에는 희소한 금귤을 맥주에 넣고, 여름에는 당도가 적절히 차는 복분자와 요거트를 섞은 것이 대표적이다. 아무리 많은 샘플을 버리더라도 최상의 맛을 낼 때까지 반복해서 연구하는 것이 서울집시의 원칙이다. 예컨대 안동 체리자두 맥주의 경우, 그 해의 농산물이 폭우를 맞거나 샘플 맥주가 만족스럽지 않아서 3년 넘게 레시피를 연구한 바 있다.
서울집시 제품별 포스터_1) 자연 효모로 만든 뒷동산 에일, 2) 지리산 생제피 및 제주도 하귤로 만든 코 끝에 여름, 3) 이천 쌀로 만든 브루트 IPA
연구를 거듭하며 완성한 맥주는 그 자체로 마케팅 포인트가 됐다. 효모, 과일, 농산물 등 특정 재료를 집요하게 파고든 과정을 SNS로 알린 것! 예컨대 브랜드 최초의 맥주 '뒷동산 에일'을 홍보할 땐 뒷동산에서 채취한 자연 효모로 양조한 점을 알리는 데 주력했고, 그 결과 지금도 가장 상징적인 스테디셀러로 꼽힌다. 당시 개성있는 국내 에일이 적었던 만큼, 서울집시의 제품별 스토리는 맥주 덕후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또한 이미 팬덤을 보유한 브루어리들과 협업했다는 점에서도 제품 출시 소식이 알려지는 데 용이했다.
이 대표는 맥주 개발 과정에서 '1%에 집착하는 자세'를 강조한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은 부분도 1%라도 특별한 맛을 내는 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시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수제맥주처럼 경쟁이 치열한 F&B 시장에서는 지독하게 그 1%를 여러 번 쌓아야 주목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경험'을 만들면 불리한 상권은 없다
맥주 덕후들 사이에서 서울집시는 '핫한 펍'으로도 자주 언급된다. 캔 제품을 생산하지 않던 창업 초반에는 자체 펍이 곧 핵심 유통 채널이었다. 잔 단위로 맥주를 판매했으며 현재 종로구 서순라길과 용산구 한강진역 인근에서 총 2개 펍을 운영 중이다.
특히 2017년, 브랜드 론칭과 동시에 오픈한 종로점은 서울 종묘 외벽을 따라 뻗어있는 '서순라길'을 부활시킨 최초의 핫플로 꼽힌다. 처음 매장을 준비할 땐 연남동, 가로수길처럼 인기 있는 상권이 욕심났지만 임대료가 비싼 탓에 포기해야만 했다. 임대료가 저렴하면서도 맥주 마실 분위기가 나는 곳을 찾겠다며 4개월 간 서울 곳곳을 순회한 배경이다.
동네마다 생생한 정보를 얻기 위해 터줏대감격인 어르신들과 바둑을 두거나 술자리를 갖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서순라길을 처음 알게 됐고, 매물을 본 순간 자신이 찾던 곳임을 직감했다. 주요 서울 상권에 비해 임대료 부담이 낮고, 종묘 외벽과 서순라길을 보며 맥주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된 것. 서울집시가 추구하는 K-팜하우스 에일에 딱 어울리는 한국식 풍경이었다.
서순라길에 위치한 서울집시 펍
다만 침체된 상권이란 점이 문제였다. 지인 모두가 이렇게 비인기 골목에서 시작하는 건 무모한 도박이라고 말릴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거리에 식당이라곤 전무했고, 휑하게 빈 임대 공간만 가득할 뿐이었다. 당시 계약하려던 매물 또한 지붕조차 없이 방수포로만 덮인 방치된 창고였던 탓에 지인들의 반박은 더욱 거셌다.
하지만 이 대표는 굳건했다. 서울집시만의 특별한 경험을 설계한다면 어떻게든 맥주 덕후들이 찾아올 거라고 전망했다. 오히려 펍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권에서 만족스럽게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게 서울의 수많은 펍 중에 빠르게 알려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1·3·5호선이 겹치는 종로3가역 기준 도보 10분 거리라는 점 역시 긍정적이었다.
나쵸와 치킨을 팔지 않는 이유
이 대표는 펍에서 ‘맥주를 새롭게 맛보고 제대로 이해하는 경험’에 초점을 맞췄다. 맥주 덕후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고, 나아가서는 그들이 주변의 수제맥주 입문자들과 함께 오고 싶을 만한 매장이 되길 꿈꿨다.
첫 번째 전략은 남다른 안주 구성! 다른 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쵸, 치킨은 없다. 대신 고수와 매운 향신료 등으로 맛을 낸 에스닉 푸드*가 즐비하다. 동그란 감자 튀김 위에 향신료를 넣고 매콤하게 볶은 소고기와 고수를 올린 ‘쵸리조 테이터 팟’, 마라 향을 풍기는 ‘사천식 라구파스타’, 탑처럼 쌓아 올린 감자에 매운 소스를 뿌린 ‘볼케이노 감자샐러드’까지. 다른 펍에서 볼 수 없는 메뉴들을 자랑한다. 맥주를 만들 때도 그랬듯 똑 같은 맛을 거부하는 이 대표의 고집스러움이 반영된 구색이다.
*에스닉 푸드: 이국적인 맛과 향이 특징인 세계 각지의 음식
서울집시 메뉴들_1) 쵸리조 테이터 팟, 2) 사천식 라구 파스타, 3) 볼케이노 감자샐러드
연남동 및 가로수길에 비해 접근성이 떨어지는 서순라길까지 오게끔 만들려면 특색있는 안주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여느 펍처럼 나쵸와 치킨을 판매하는 건 매장이 알려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흔한 메뉴들을 준비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과 에너지를 시그니처 안주를 만드는 데 모두 쏟았다. 또한 야생 효모로 인해 향신료 풍미가 나는 팜하우스 에일과의 페어링을 고려했을 때도 에스닉 푸드가 적절했다. 앞으로도 향신료 맛이 돋보이는 새로운 안주들을 출시할 예정이다.
최근에는 이색적인 메뉴 외에도 새로운 미식 경험을 더하고 있다. '헬레스' 맥주 1가지 종류를 손님의 입맛에 맞춰 5가지 스타일로 따라주는 '푸어링'이 대표적이다. 맥주가 녹아든 거품으로 잔 대부분을 새하얗게 채우는 밀코부터, 거품을 따로 얹어서 탄산감을 보존하는 드라이 푸어 등이 눈과 입을 만족시킨다.
푸어링 종류 안내판 및 서비스 예시
입문자를 위한 서비스로는 쉽고 친절한 큐레이션을 더했다. 운영 초반, 종로점 메뉴판에는 일부러 맥주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적지 않았다. 메뉴판만 읽고 맥주를 고르기 보단, 홀 직원에게 선호하는 취향을 말한 후 추천받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소통 과정에서 홀 직원이 맥주별 맛은 물론 레시피의 특이점, 개발 과정에서의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공유하게끔 만들려는 묘수였다.
실제 서울집시 매장들은 자세하고 친절한 큐레이션 서비스로 입소문 나있다. 정해진 큐레이션 원칙이 있는 건 아니지만 답하기 쉬운 질문들을 지향한다. 평소 실험적인 음식에 도전하는 편인지, 과일향을 좋아하는지 등 쉬운 질문들로 맥주 취향을 함께 찾아가는 식이다. 실제 홀 서빙을 차별화하기 위해 맥주 덕후들을 우선적으로 채용하고, 서비스 전문가들을 초청해서 전체 직원 교육을 꾸준히 실시해왔다.
서울집시 펍은 이제 '오픈런해야 하는 서순라길 맛집'으로 자리매김했다. 평일 저녁 6시에 대기 등록해도 2시간 넘게 기다려야 하며 새로운 맥주를 최초 공개하는 릴리즈 데이에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단골도 많다.
평범함을 거부하는 수제맥주와 펍으로 팬덤을 쌓아온 서울집시는 2021년 7월 경기도 광주 초월읍 산자락에 자체 양조 시설까지 마련했다. 그해 10월, 브랜드 최초로 캔 제품을 출시하는 등 양조장으로 꾸준히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는 중이다.
이현오 서울집시 대표는 업계에서 똑같은 것을 시도하지 않은 것이 브랜드 성장을 견인했다고 강조한다. 시장에서 영향력 있는 소수를 타깃팅하고, 시장 흐름에 역행하더라도 목표 고객이 좋아할 만한 요소라면 고집스럽게 반영해 온 전략이 주효했다는 입장이다. 독특한 식재료를 가미한 팜하우스 에일, 반대를 무릅쓰고 차린 매장, 나쵸와 치킨 대신 내놓은 에스닉 푸드가 그 결과물인 셈이다. 평생 맥주를 만들고 싶다는 그는 앞으로도 '맥주로 새롭게 재미를 줄 수 있는 일'에 도전하는 고집불통이 되겠다고 밝혔다.
에디터 이한규ㅣ사진 출처 서울집시
이 글이 좋았다면?
압구정을 살린 백곰막걸리의 300잔 | 샴페인 아니고 맥주입니다 | 맥주계의 N잡러가 만든 논알콜 맥주 |
서울집시 펍이 위치한 서순라길 및 서울집시 맥주
딱 1번의 기회를 원했던 양조사
맛있지만 아직 대중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맥주. 이 대표가 브루어리에서 양조사로 재직하던 2015년, 신제품용 샘플을 낼 때마다 돌아온 피드백이다. 그는 당시 한국 수제맥주 시장에 아쉬움을 느꼈다. 2014년부터 소규모 양조장의 외부 유통이 허용됨에 따라 본격적으로 국내 수제맥주 시장이 태동했지만 주로 전통적인 에일 맥주들이 유통됐다. 소비자들의 선호도에 따른 자연스러운 시장 흐름이었다.
한편 이 대표는 국내 수제맥주 시장이 발전하려면 실험적인 에일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개성 넘치는 한 잔'을 목표로 신제품 개발에 몰두했으나 사내에서 매번 퇴짜 맞기 일쑤였다. 회사 입장에선 당장 안전한 길을 내버려두고, 성공 가능성이 불확실한 제품에 투자할 리 없었다.
1) 서울집시 펍 앞에서 대기 중인 손님들, 2) 서울집시 펍 내부
결국 실험적인 한국 맥주를 만들겠다는 각오로 퇴사했다. 하지만 열정과 달리 창업이란 현실은 냉정할 뿐이었다. 당장 양조장을 차리는 것부터 버거웠다. 장비를 추가하다 보면 1~2억 원은 우습게 들어가는데, 모아놓은 월급과 퇴직금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투자자를 찾는 것도 모순적이었다. 애초에 당장 수익이 나지 않을 독특한 맥주를 만들려고 퇴사한 건데, 투자를 받게 되면 많이 팔릴만한 대중적인 제품을 만들자는 개입이 들어올 게 뻔해서다. 창업 후 지금까지 모든 투자 제안을 거절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 대표는 현실적으로 집시 양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2년 넘게 연구해 온 수많은 양조 레시피를 가지고, 브루어리 섭외에 나섰지만 순탄치 않았다. 해외 시장과 달리 국내에선 '집시 양조'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한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대략적인 콘셉트와 맛을 의뢰하면 그에 맞춰 만들어 주는 OEM 방식이야 흔했지만, 레시피 보완부터 실제 생산까지 모든 단계를 함께 구체화하자는 제안에는 브루어리들이 부담스러워했다.
게다가 자연 효모를 채취하고 깔끔한 맛을 내기 위해 더 오래 숙성하는 레시피인 탓에 평균 대비 양조 기간이 2배 이상 소요된다는 점도 문제였다. 생산비 부담이 가중된다는 점에서 소규모 양조장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일부 업체에선 "OEM하면 2주 만에 출시하는데, 팔릴지도 모르는 제품에 한 달 가까이 투자할 수 있겠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매일 불안감에 휩싸였지만 포기하진 않았다. 단 한 번의 협업만 성사시키면 그 맥주를 성공시켜서 향후 다른 브루어리들을 설득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로 활용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약 4개월 동안 자신처럼 실험적인 수제맥주를 원하는 양조장을 찾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 통씩 전화하고, 전국을 순회했다. 숱한 노력 끝에 맥주에 대한 진심을 높이 평가해 준 양조장과 함께 첫 번째 파트너십을 맺었다.
서울집시 펍 내부의 탭 코너
1%에 집착할 줄 아는 자세
이 대표는 처음부터 '맥주 덕후들이 좋아할 만한 이색적인 맛'을 목표 삼았다. 당장은 대중에게 외면받더라도 맥주 마니아들로 구성된 니치 마켓에선 인정받자는 전략이었다. 절대적인 규모는 작지만 시장에서 새로운 맛을 알리고 트렌드를 선도하는 집단인 만큼, 브랜드가 다수의 잠재 고객에게 알려지는 교두보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들을 겨냥해서 정한 콘셉트는 팜하우스 에일! 팜하우스란 동유럽 농부들이 농사를 짓고 남은 작물로 만들던 맥주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전 세계 맥주 종류마다 쓴맛과 탄산감 등의 대략적인 정도가 규정된 것과 달리, 팜하우스는 사용하는 재료와 양조 방식이 제각각이라 기본 맛을 중심으로 여러 변주를 주는 것이 특징이다. 와인처럼 한국식 떼루아*를 살린 새로운 K-맥주를 갈망하던 그에겐 훌륭한 선택지였다.
*떼루아: 와인, 커피 등이 만들어지는 자연 환경
1) 서울집시가 복분자로 만든 복분자 IPA, 2) 다양한 식재료를 활용하는 서울집시의 개발 과정
맥주의 필수 재료 4가지(물, 맥아, 효모, 홉) 중 가장 먼저 '효모'에 차별점을 뒀다. 대중적인 맥주를 제조할 땐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효모를 투입하는 것이 효율적이지만, 수제맥주의 개성을 살리려면 공기 중에서 확보한 자연 효모를 더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재배조건이 까다로워서 주로 수입하는 홉과 달리, 효모는 번거롭지만 국내에서도 채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욕심낼만한 재료였다.
팜하우스 맥주답게 로컬 식재료도 적극 활용했다. 안동 햇생강, 지리산 생제피(잎), 이천 쌀, 제주도 하귤 등 수제맥주 시장에서 보기 드문 재료들을 가미하고 각 재료의 매력을 살린 것이 특징이다. 예컨대 이천 쌀로 부드러운 질감과 단 맛을 높이고, 안동 햇생강으로 스파이시함을 강조하고, 지리상 생제피 잎과 제주도 하귤로 시트러스함을 더한 맥주들을 선보였다.
제철 식재료로 만든 제품도 꾸준히 출시해왔다. 봄에는 희소한 금귤을 맥주에 넣고, 여름에는 당도가 적절히 차는 복분자와 요거트를 섞은 것이 대표적이다. 아무리 많은 샘플을 버리더라도 최상의 맛을 낼 때까지 반복해서 연구하는 것이 서울집시의 원칙이다. 예컨대 안동 체리자두 맥주의 경우, 그 해의 농산물이 폭우를 맞거나 샘플 맥주가 만족스럽지 않아서 3년 넘게 레시피를 연구한 바 있다.
서울집시 제품별 포스터_1) 자연 효모로 만든 뒷동산 에일, 2) 지리산 생제피 및 제주도 하귤로 만든 코 끝에 여름, 3) 이천 쌀로 만든 브루트 IPA
연구를 거듭하며 완성한 맥주는 그 자체로 마케팅 포인트가 됐다. 효모, 과일, 농산물 등 특정 재료를 집요하게 파고든 과정을 SNS로 알린 것! 예컨대 브랜드 최초의 맥주 '뒷동산 에일'을 홍보할 땐 뒷동산에서 채취한 자연 효모로 양조한 점을 알리는 데 주력했고, 그 결과 지금도 가장 상징적인 스테디셀러로 꼽힌다. 당시 개성있는 국내 에일이 적었던 만큼, 서울집시의 제품별 스토리는 맥주 덕후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또한 이미 팬덤을 보유한 브루어리들과 협업했다는 점에서도 제품 출시 소식이 알려지는 데 용이했다.
이 대표는 맥주 개발 과정에서 '1%에 집착하는 자세'를 강조한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은 부분도 1%라도 특별한 맛을 내는 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시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수제맥주처럼 경쟁이 치열한 F&B 시장에서는 지독하게 그 1%를 여러 번 쌓아야 주목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경험'을 만들면 불리한 상권은 없다
맥주 덕후들 사이에서 서울집시는 '핫한 펍'으로도 자주 언급된다. 캔 제품을 생산하지 않던 창업 초반에는 자체 펍이 곧 핵심 유통 채널이었다. 잔 단위로 맥주를 판매했으며 현재 종로구 서순라길과 용산구 한강진역 인근에서 총 2개 펍을 운영 중이다.
특히 2017년, 브랜드 론칭과 동시에 오픈한 종로점은 서울 종묘 외벽을 따라 뻗어있는 '서순라길'을 부활시킨 최초의 핫플로 꼽힌다. 처음 매장을 준비할 땐 연남동, 가로수길처럼 인기 있는 상권이 욕심났지만 임대료가 비싼 탓에 포기해야만 했다. 임대료가 저렴하면서도 맥주 마실 분위기가 나는 곳을 찾겠다며 4개월 간 서울 곳곳을 순회한 배경이다.
동네마다 생생한 정보를 얻기 위해 터줏대감격인 어르신들과 바둑을 두거나 술자리를 갖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서순라길을 처음 알게 됐고, 매물을 본 순간 자신이 찾던 곳임을 직감했다. 주요 서울 상권에 비해 임대료 부담이 낮고, 종묘 외벽과 서순라길을 보며 맥주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된 것. 서울집시가 추구하는 K-팜하우스 에일에 딱 어울리는 한국식 풍경이었다.
서순라길에 위치한 서울집시 펍
다만 침체된 상권이란 점이 문제였다. 지인 모두가 이렇게 비인기 골목에서 시작하는 건 무모한 도박이라고 말릴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거리에 식당이라곤 전무했고, 휑하게 빈 임대 공간만 가득할 뿐이었다. 당시 계약하려던 매물 또한 지붕조차 없이 방수포로만 덮인 방치된 창고였던 탓에 지인들의 반박은 더욱 거셌다.
하지만 이 대표는 굳건했다. 서울집시만의 특별한 경험을 설계한다면 어떻게든 맥주 덕후들이 찾아올 거라고 전망했다. 오히려 펍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권에서 만족스럽게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게 서울의 수많은 펍 중에 빠르게 알려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1·3·5호선이 겹치는 종로3가역 기준 도보 10분 거리라는 점 역시 긍정적이었다.
나쵸와 치킨을 팔지 않는 이유
이 대표는 펍에서 ‘맥주를 새롭게 맛보고 제대로 이해하는 경험’에 초점을 맞췄다. 맥주 덕후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고, 나아가서는 그들이 주변의 수제맥주 입문자들과 함께 오고 싶을 만한 매장이 되길 꿈꿨다.
첫 번째 전략은 남다른 안주 구성! 다른 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쵸, 치킨은 없다. 대신 고수와 매운 향신료 등으로 맛을 낸 에스닉 푸드*가 즐비하다. 동그란 감자 튀김 위에 향신료를 넣고 매콤하게 볶은 소고기와 고수를 올린 ‘쵸리조 테이터 팟’, 마라 향을 풍기는 ‘사천식 라구파스타’, 탑처럼 쌓아 올린 감자에 매운 소스를 뿌린 ‘볼케이노 감자샐러드’까지. 다른 펍에서 볼 수 없는 메뉴들을 자랑한다. 맥주를 만들 때도 그랬듯 똑 같은 맛을 거부하는 이 대표의 고집스러움이 반영된 구색이다.
*에스닉 푸드: 이국적인 맛과 향이 특징인 세계 각지의 음식
서울집시 메뉴들_1) 쵸리조 테이터 팟, 2) 사천식 라구 파스타, 3) 볼케이노 감자샐러드
연남동 및 가로수길에 비해 접근성이 떨어지는 서순라길까지 오게끔 만들려면 특색있는 안주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여느 펍처럼 나쵸와 치킨을 판매하는 건 매장이 알려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흔한 메뉴들을 준비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과 에너지를 시그니처 안주를 만드는 데 모두 쏟았다. 또한 야생 효모로 인해 향신료 풍미가 나는 팜하우스 에일과의 페어링을 고려했을 때도 에스닉 푸드가 적절했다. 앞으로도 향신료 맛이 돋보이는 새로운 안주들을 출시할 예정이다.
최근에는 이색적인 메뉴 외에도 새로운 미식 경험을 더하고 있다. '헬레스' 맥주 1가지 종류를 손님의 입맛에 맞춰 5가지 스타일로 따라주는 '푸어링'이 대표적이다. 맥주가 녹아든 거품으로 잔 대부분을 새하얗게 채우는 밀코부터, 거품을 따로 얹어서 탄산감을 보존하는 드라이 푸어 등이 눈과 입을 만족시킨다.
푸어링 종류 안내판 및 서비스 예시
입문자를 위한 서비스로는 쉽고 친절한 큐레이션을 더했다. 운영 초반, 종로점 메뉴판에는 일부러 맥주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적지 않았다. 메뉴판만 읽고 맥주를 고르기 보단, 홀 직원에게 선호하는 취향을 말한 후 추천받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소통 과정에서 홀 직원이 맥주별 맛은 물론 레시피의 특이점, 개발 과정에서의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공유하게끔 만들려는 묘수였다.
실제 서울집시 매장들은 자세하고 친절한 큐레이션 서비스로 입소문 나있다. 정해진 큐레이션 원칙이 있는 건 아니지만 답하기 쉬운 질문들을 지향한다. 평소 실험적인 음식에 도전하는 편인지, 과일향을 좋아하는지 등 쉬운 질문들로 맥주 취향을 함께 찾아가는 식이다. 실제 홀 서빙을 차별화하기 위해 맥주 덕후들을 우선적으로 채용하고, 서비스 전문가들을 초청해서 전체 직원 교육을 꾸준히 실시해왔다.
서울집시 펍은 이제 '오픈런해야 하는 서순라길 맛집'으로 자리매김했다. 평일 저녁 6시에 대기 등록해도 2시간 넘게 기다려야 하며 새로운 맥주를 최초 공개하는 릴리즈 데이에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단골도 많다.
평범함을 거부하는 수제맥주와 펍으로 팬덤을 쌓아온 서울집시는 2021년 7월 경기도 광주 초월읍 산자락에 자체 양조 시설까지 마련했다. 그해 10월, 브랜드 최초로 캔 제품을 출시하는 등 양조장으로 꾸준히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는 중이다.
이현오 서울집시 대표는 업계에서 똑같은 것을 시도하지 않은 것이 브랜드 성장을 견인했다고 강조한다. 시장에서 영향력 있는 소수를 타깃팅하고, 시장 흐름에 역행하더라도 목표 고객이 좋아할 만한 요소라면 고집스럽게 반영해 온 전략이 주효했다는 입장이다. 독특한 식재료를 가미한 팜하우스 에일, 반대를 무릅쓰고 차린 매장, 나쵸와 치킨 대신 내놓은 에스닉 푸드가 그 결과물인 셈이다. 평생 맥주를 만들고 싶다는 그는 앞으로도 '맥주로 새롭게 재미를 줄 수 있는 일'에 도전하는 고집불통이 되겠다고 밝혔다.
에디터 이한규ㅣ사진 출처 서울집시
이 글이 좋았다면?
압구정을 살린 백곰막걸리의 300잔
샴페인 아니고 맥주입니다
맥주계의 N잡러가 만든 논알콜 맥주